
펌) G+159.1 #PSB #電腦星 오늘의 키워드 #공정
[미치도록 “공정!“을 외치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불행할까요. 앙상한 공정 하나밖에는 남지 않은 빈약한 사회라서가 아닐까요. 서울대 정문에서는 왜 오늘 저녁 횃불시위가 벌어지지 않을까요. 대법원 3심까지 갔으면 그럭저럭 공정의 틀을 갖춰서? 최효훈 독자가 묻습니다.]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하나만 꼽으라면 '공정'이라고 생각한다. 공정이라는 키워드는, 정치와 경제/사회와 문화를 넘나들며 곳곳에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었다. 어떤 정치인이 될 것인지 말하는 자리에도, 무언가의 대표를 뽑을 때에도, 스포츠 경기나 일상 속 다양한 결정의 순간에도 우리는 '공정'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고 산다.
공정이 중요한 이유는 명료하다. 공정해야, 사람들은 받아들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불공정'이다. 한국인들은 비합리적인 것도 참고, 불공평한 것도 참지만, 공정하지 못한 건 참기 어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도 그렇다. 우리 사회를 휩쓸고 간 이슈들 중에서 '공정'이 빠져있는 것이 있던가? 우리는 음식점이 손님을 맞이하는 방법에서도 '공정'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회를 살고 있다.
공정이 가진 그 의미를 부정하거나,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공정의 의미를 '모두가 같은 기준으로 평가받거나, 움직이거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그동안 분노해왔던 것들은 바로 그 의미에서 움직였다. 대학 입학은 누구나 같은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하고, 회사 입사도 누구나 같은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하고, 대회도 그렇고 스포츠 선수 선발도 그렇다. 우리는 늘 외쳐왔다. '우리를 같은 기준으로 바라봐주세요'라고.
같은 기준으로 바라봐 달라는 이야기는 다시 말하면, 우리를 '비교'해달라는 이야기와 같다. 애초에 다른 건 비교할 수 없다. 비교는 같은 기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A와 B를 비교하려면, A와 B는 같은 선상에 있거나 같은 종류의 것이어야 한다. 같은 샴푸를 놓고 가성비를 비교할 수는 있지만, 샴푸와 비누를 같이 비교하는 건 맞지 않다. '비누는 비누만의 평가 기준이 있고 샴푸는 샴푸만의 평가 기준이 있는 것 아닌가요?'라는 질문이 바로 튀어나올 것이다.
우리는 비교에 익숙하다. 우리는 같은 기준에서 평가받는 것이 익숙하다. 아니, 사실 그것을 바란다. 우리 반에 있는 30명은 같은 기준으로 평가받는 것이 좋다. 대학을 입학할 때에도, 60만명의 수험생이 같은 기준으로 평가받는 것이 좋다. 직업을 가질 때도 마찬가지다. 한국에 사는 5천만 명은, 놀랍게도 모두가 같은 레이스를 한다. 모두가 '성공'이라는 목표를 두고, 모두가 그 레이스를 뛴다. 한국인들이 경쟁하는 그 기준은 바로 '성공'이다. 그 성공은 각자 다르지 않겠냐고? 사실 그들은 각자 다른 레이스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그렇다고 하기엔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와 00 성공했네'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은 정해져 있다. 누군가가 꿈을 찾아 남미로 가서 게스트하우스를 연다거나, 갑자기 서핑에 빠져 양양에서 서핑샵을 차린다고 사람들은 '성공했네'라고 하지 않는다. 대신 '멋지다'라고 한다. 우리가 성공했다고 말하는 건, 보통 다음과 같은 상황들이다. 비싼 아파트를 샀거나, 좋은 직장에 들어갔거나, 높은 연봉을 받거나, 사업을 크게 키웠거나, 100만 유튜버가 되거나, 투자에 성공했거나, 뭐 여튼. 어쨌거나 중요한 건 하나다. '큰 돈'을 벌거나 '큰 돈을 벌 것 같은' 상황이 되는 일이다. 앞서 소개한 서핑샵을 차린 사례에서, 그 서핑샵이 큰 매출을 찍기 시작한다면 그제서야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성공했네'라고.
5천만 명은 같은 성공을 꿈꾼다. 그 성공은 숫자로 정의된다. 명확하고 틀림이 없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1억을 번 것 가지고는 성공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10억을 벌었다고 하면 성공했다고 할 것이고, 연봉이 1억이라고 하면 성공했다고 할 것이다. 얼마 이상의 차를 타면 성공했다고 할 것이고, 얼마 이상의 가격이 되는 아파트에 거주한다면 성공했다고 할 것이다. 자신만의 길을 찾았다고 해서,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한다고 해서, 알아주지 않고 대접받지 않는 직업에 뛰어든다고 해서 그 자체로 사람들은 성공했다고 하지 않는다. '와 너만의 길을 가다니 너무 멋있어!'라고만 해줘도, 사실 다행이다.
우리에게 공정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서 나온다. 우리는 모두 같은 경쟁 레이스에 올라 있다. 내 아파트와 내 직장과 내 학교가 나의 삶의 성공 여부를 결정지어주는 경쟁 레이스다. 이 경기장 안에 들어온 이상, 우리에겐 공정이 최우선의 가치가 된다. 우리는 같은 목표를 노리고 있는데, 그 목표엔 한정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으니까. 나 대신 저 사람이 그것을 얻어낸다면, 우리는 심판에게 따질 수밖에 없다. '왜 쟤죠?'라고. 그 때 심판이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거리게 할 만한 이야기를 한다면, 사람들은 다시 이를 악물고 다음 레이스를 준비한다. 그리고 이 경기가 열린 수십년의 세월 속에서, 모두가 인정한 심판의 대답이 있다.
바로 숫자다. '쟤는 전과목 1등급을 받았어', '쟤는 토익점수가 990이야', '쟤는 우리 사내평가에서 모두 1등이야'. 숫자를 통해 사람들 줄을 세우면 된다. 심판이 '이 경기장에 들어온 사람들 전부를 줄 세워 봤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몇 등까지 끊었어요'라고 하면 사람들은 알겠다고 한다. 그 앞 라인에 들어가지 못한 내가 잘못했고 등신이었으니 그들은 그들의 성취를 가져도 된다고 한다. 왜냐면 다음엔 내가 열심히 해서, 그 라인 앞에 설 테니까. 그러면 그렇게 노력한 나를 위한 달콤한 성과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사람들은 다시 이를 앙다물고, 다짐하고, 스스로를 몰아세운다. '정말 죽을만큼 노력했니, 나?'
사람들이 모두가 인정할만한 기준은 '공정한 기준'이다. 여기서 공정은 앞서 말했듯 '하나의 기준'이 중요하다. 쟤는 뭘 잘해서 앞에 세우고, 뭘 잘헤서 앞에 세우고가 되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공정하지 않다. 우리 모두, 하나의 기준 앞에 섰다. 그리고 누군가는 노력을 통해 그것을 쟁취했다. 간단하고, 명료하다. 그것이 우리가 만든, 우리가 들어와 있는 이 링의 규칙이다. 누군가가 그것을 훼손한다면 우리는 소리를 지른다. '공정하지 않아!'라고. '왜 쟤는 나와 다른 경기를 치른 것으로 점수를 받지?', '쟤는 내가 한 것을 하지 않았는데 왜 무언가를 얻지?'라는 물음이 잇따른다. 심판은 이쯤되면 머리가 지끈지끈해진다. 그러면 답은 하나다. 이 모든 사람을, 촘촘히, 더 촘촘하게 줄 세울 수 있는 숫자의 기준을 만드는데 집중하면 된다.
그렇게 전국민이 매달리는 '수능'이라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출제위원은 몇개월씩 갇혀 문제를 만들고, 이 시험을 위해 비행기는 이착륙이 금지되고, 경찰은 수험생들을 실어나른다. 이렇게까지 진심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모두' 같은 경기장에 들어와 있고, 이 경기장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가 바로 수능이고, 이 경기의 결과가 우리가 뛰고 있는 레이스에서 중요한 판가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정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이유고, 우리 사회가 공정해야만 하는 이유다. 우리는 모두 같은 경기장에 올라서서, 같은 기준으로 평가받고, 그 결과에 따라 이 사회가 가진 '부'를 얻을 권리를 가진다. 그리고 그 부를 얼마나 쟁취했느냐가 우리 사회의 '성공적인 삶'을 나타내는 지표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그 '부'를 향해 뛴다. 전 국민이.
이 경기는, 이제 하나의 예술과 같다. 그 완결성은 찬사가 나올 정도다. 전 국민이 수십년을 매달렸으니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이건 '자격이 부족한 사람이 무언가를 더 가졌다'라거나 '기준에 오류가 있었다' 따위의 사소한 문제와는 다른 이야기다. 바로 '이 경기장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어졌다'는 문제다. 그리고 더해서, 이상하게 이 경기장에 들어와서 레이스의 상위에 선 사람들이 '너무 불행하다'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문제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이들은 자신이 가진 즐거움을 티내고 싶지 않아서, 유교의 전통에 따라 '겸손'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전 세계에서 경이적으로 낮은 출산율과 높은 자살율, 높은 노인 빈곤율을 가지고 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전 국민과의 경쟁 레이스에서 이겨서 많은 부를 얻었는데 왜 행복하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왜 그들은 자살을 택하고, 삶에 의미가 없었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들은 '자신의 자식은 이 경기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해외에 있는 다른 어딘가로 자신의 자식을 보내거나, 애초에 경기장에 마땅히 들어와야할 자식을 낳지 않는 것일까? 우리가 설계한 이 경기장은 완벽한데? 공정이라는 가치를 기틀에 세운 이 경기장은 대한민국을 성장시킨 동력이고 한강의 기적을 만든 원인인데? 밤 늦게까지 공부하고 일하고 새벽에 나가서 일하게 만든 이 경기장의 시스템이야말로, 한국인의 근면성과 능력을 보여주는 그 자체의 '작품'인데? 그동안 이 시스템에 대해서 비판하던 작자들이야 '노력'하지 않아서 얻게 된 결과에 불평하는 '패배자'들에 불과한 것이고, 이 시스템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데?
최근 우리나라의 합계 출산율은 0.73이었다. 압도적인 전 세계 꼴지다. 그리고 무엇보다 빠른 속도로 가파르게 바닥을 향해가고 있다. 왜 사람들은 이 좋은 경기장에 자신의 자식을 데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모두가 불행해 보이고, 모두가 지쳤다고 말하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날이 갈수록 공정해진다는데, 그 공정을 바탕으로 한 이 경기장에서 왜 사람들이 떠나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왜? 대체 왜? 공정이 싫은 사람도 없고 돈이 싫은 사람도 없을 텐데 도대체 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를 물었다. 많은 국가의 답변은 비슷했다. 가족이 우선순위였다. 하나 튀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우리였다. 우리는 압도적으로 '돈'이라고 답했다. 전 세계 사람들은 위선자일까? 사실 돈이 좋으면서, 돈다발 안겨주면 좋아할 거면서 내숭을 떨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들의 게으름이나 노력하지 않음에 대해서 미리 밑밥을 깔기 위해 '저는 돈이 중요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구요'라고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일까? 노력하지 않고, 게으른 멍청이들. 성장하지 않는 작자들. 그럼 우리만이 삶에서 중요한 진리를 깨닫고, 그를 성취하기 위한 경기장을 일찌감치 세워놓은 것일까? 우리는 역시 앞서나가는 선진국인 것일까? 그러니 사람들이 요새 'K'에 빠진 것일까? 강남스타일도, 오징어게임도, 손흥민도, 기생충도, 모두 다? 전 세계 사람들은 우리를 본받으면 되는 것일까? 우리는 드디어 선도국가가 되는 것일까?
이상한 일이다. 우리에겐 이 모든 세상의 원칙이 단순하고 간결한데,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것 같다. 우리는 실제로 한강의 기적도 이뤘고, K-르네상스도 왔다. 우리는 그만큼 노력했고, 성취했다. 근데 왜, 근데 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왜 '정말 이게 맞나'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말하고 이곳을 떠나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이곳을 헬조선이라고 불렀던 것일까? 왜? 대체 왜?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우리처럼 공정을 기반으로 한 경기장 하나를 만들고 전 국민이 함께하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왜 다른 나라는 이러지 않는지, 왜 경기를 하는 사람은 줄어만 가는지, 대체 왜...
공정은 표면에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근간은 다른 곳에 있다. 바로 우리가 만든 사회는 '성공이 하나 뿐인 사회'였기 때문이다. 성공이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공정을 외친 것 뿐이다. 즉 우리가 말한 건 공정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다. 우리의, 아니 나의 성공을 위해 공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우리는 공정을 외쳐왔다. 제발 나를 남과 같은 기준에서 평가해 주세요. 아니, 우리 모두 같은 기준과 선상에서 바라봐 주세요. 우리를 비교해주세요. 그리고, 내가 그 비교에서 남보다 낫다면 나에게 더 많은 걸 주세요. 우리는 그런 사회가 좋아요. 우리는 그런 사회를 원해요.
공정을 원하는 우리는 불행하다. 누군가가 음악을 한다고 했을 때, 누군가가 음식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누군가가 농사를 짓겠다고 했을 때, 누군가가 글을 쓴다고 했을 때, 누군가가 여튼 무언가를 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너가 하고 싶은 걸 하다니, 성공인걸!'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불행하다. 내 옆에 있는 9명의 다른 사람과 나를 줄세워주었으면 좋겠고, 그것의 순위를 증명하고 싶기 때문에 우리는 불행하다. 다른 누군가가 '나는 큰 돈을 벌고 싶은 대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라고 했을 때 응원해주기보다는 여러 생각과 감정과 걱정이 교차하기 때문에 우리는 불행하다. 우리의 자식이 자기는 공부와 맞지 않는다고 할 때 공부를 해야 인간 대접을 받는 사회라고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불행하다. 내가 겪어온 레이스를 그대로 겪지 않는 사람을 비웃고, 짓밟고, 무시하기 때문에 우리는 불행하다. 이 레이스에 들어오기 싫어하는 자식을 억지로 끌고 와야만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우리는 불행하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한다. 불행하기 때문에, 나의 자식에게는 이 불행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한 때 '퇴사했습니다'에 대한 붐이 불었다. 요새의 붐은 당시의 그 붐을 비웃는 것이 붐인 것 같다. '그 때 퇴사하겠다고 까불던 애들, 욜로한다고 까불던 애들 남들 아파트 살 때 빌빌거리고 전셋집 하나 못 구하죠?'라고 비웃으며 '거 봐라. 이 레이스를 떠나긴 어딜 떠나느냐. 건방진 것들, 자기들이 뭐라도 될줄 알았나? 꾹 참고 이 레이스를 버텨온 나 자신이야말로 대단한 것이다'라고 하는 게 요새의 트렌드인가 싶다. 글쎄, 잘 모르겠다. 누군가는 '나는 그 아파트에 들어가지 않아도 지금의 내가 좋아'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들의 성공 여부를 내가 재단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기가 좋으면 그만 아닌가. 그러면 그 질문은 나에게로 돌아온다.
그럼, 내가 좋으려면 나는 뭘 해야 하지?
하지만 두렵다. 내 주변에는 이 레이스를 벗어난 사람이 많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벗어난 사람들을 우리는 이 안전한 경기장 안에서 비웃어 왔다. '저렇게 살면 큰일나는 거라고'. 나도 큰일나는게 아닌가 싶고, 애초에 벗어나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우리는 이 경기장 밖의 삶을 상상해본 적도 없다. 우리에겐 이 경기장이 전부고, 이 경기장 안에서의 결과가 전부다. 내 삶의 의미는 이 경기장 안에서만 유효하다. 이 경기장 안에서 패배한다면 내 삶의 의미도 고작 그 정도인 것이고, 내 삶의 의미가 이 경기장에서 인정받는다면 내 삶의 의미도 대단한 것이다. 대체 이 경기장 밖에서의 삶은 무엇이고, 그것은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나는, 아니 우리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무언가 불안하다. 이 불안감의 원인을, 우리는 안다. 아니, 모른다.
공정은 메인이 아니다. 공정은 우리가 만든 이 경기장을 세우는 기둥에 불과할 뿐이다. 중요한 건, 우리는 경기장을 세웠고, 그 안에 우리 모두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기장의 끝은 하나 밖에 없고, 우리는 그것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살아 왔다. 아니, 어쩌면 그 경기장의 끝이 없고 그저 끊임없이 순환하는 타원형 모양의 트랙이라고 할지라도 상관 없다. 남들보다 몇 바퀴 앞서서 뛰면 누군가가 내게 와서 물도 주고 음식도 주고 메달도 걸어줄 거니까. 그게 이 경기장의 룰이고 규칙이고 법이니까.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이 경기장에서, 빨리 뛰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 밖에 없는데. 누가 뛰지도 않고 몇 바퀴를 뛰었다고 거짓말 칠 때 저 새끼 나쁜 자식이라고 불평한 것밖에 없는데. 누군가가 애초에 관람석에서 편하게 뛰지 않고 우리를 지켜보며 놀고 먹고 있다고 해도, 그건 외면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대부분은 뛰고 있으니 거기서 위안을 찾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우리에게 이 경기장 밖이 있다고, 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지 않았는데. 왜 우리는 불안하고, 불행하고, 아픈 것일까. 대체 왜?
우리 사회는 지금까지 그 질문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을 내놓은 적이 없고, 그 결과가 지금 마주하는 한국 사회다. 우리가 선택한 결과고,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결과다. 시쳇말로 세상에 공짜는 없고, 얻는 게 없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고, 우리가 만든 우리 사회의 규칙과 방식은 빠른 성장을 가져다 주었지만 다른 문제도 가져왔다. 그동안은 '나약하고, 패배자들의 얘기에 신경쓸 것 없다'고 눈을 가려왔지만, 이제 그 이야기만으로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마주하고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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