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도의 정치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이 드디어 첫 기자회견을 열었다. 참사 이전까지 전혀 연결고리가 없던 이들은 정부의 방해 덕분에 함께 모이는 것도, 위로하는 것도 힘들게 해냈다. 실제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유족들의 마음이 정리가 안된 상태에서 서로 만나게 해드리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 것인지 조심스럽다”면서 사실상 유족회 구성에 반대했다. 그럼 “마음의 정리를 다 끝낸 후” 언제 만나야 한다는 것인가?
심지어 “이태원 유가족 원스톱 통합지원센터”는 유가족 협의회 구성 및 모임 장소 제공에 관한 설문을 문자로 발송하면서 “오후 6시까지 연락이 없는 경우 의견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통지했다고 한다. 할줄 아는 것이라고는 law enforcement 밖에 없는 자가 국가의 수장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으니, 이 정부는 유족들을 상대로도 그저 통제와 억압 뿐이다.
유족들이 함께 위로하고, 논의하고, 모이는 것이 두려운가?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온 국민이 생생히 목격하는 것이 걱정스럽나? 참사 이후로 그들이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의 요구사항이 어떤 공명을 일으킬지 공포스러운가?
그렇다. 사실 권력은 두려워해야 한다. 상실과 애도의 경험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지, 그들이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다면 말이다. 그들은 애도의 정치를 허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애도의 정치는 이미 시작되었다.
사랑하는 이를 갑작스럽게 떠나보낸 적이 있는가?
상실의 경험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누군가를 애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게 되는가?
Judith Butler는 애도를 transformation 의 경험이라고 정의했다. 즉 애도란, 상실을 마주한 후, 이제껏 알지 못했던 아픔과 계속 부대끼면서 나 자신의 transformation 을 겪어나가기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실 이전과 이후가 분명히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도, 앞으로의 내 삶이 어떤 모습일지도 온전히 알지 못하는 채로 고통의 과정을 겪어나가는 것이다.
나의 목숨과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던 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삶은 무엇인가? 매일 학교에서 함께 밥을 먹던 친구가 더 이상 내 곁에 없는 삶은 어떤 삶인가?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전하고 싶었던 엄마가 내 곁에 더 이상 없다면 그것은 여전히 나의 삶인가? 밤마다 “엄마 사랑해”라고 카톡을 보내던 아들이 더 이상 없는 지금의 나는 이전의 나와 얼마나 같은가?
그래서 Judith Butler는 우리에게, 아주 간단명료한 질문을 던진다.
“네가 없는 나는 누구인가?”
이 뼈아픈 질문을 우리는 어디까지 확장시킬 수 있을까? 이 질문의 핵심은 상실과 애도의 과정이 결코 “사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 오히려 관계적 존재론(relational ontology)의 무한한 확장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삶이란 전적으로 나의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당신의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같이 엮여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깊이 상호의존적인 존재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윤리적 책임을 지고 있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이 애도의 경험을 더 큰 정치의 힘으로 확장시킬 수 있을까? “네가 없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나의 딸, 나의 아들, 나의 부모를 넘어 우리 곁에 있는 모든 이들을 향해 던질 수 있을까? 그 누구도 갑자기 “없어지지” 않는, 그 누구도 부당하게 일찍 생을 마감하지 않는 사회가 나에게도 안전한 사회라는 점을 우리는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을까?
나를 위해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고치던 네가 없는 나는 누구인가? 나를 위해 파리바게뜨 소스를 만들던 네가 없는 나는 누구인가? 언제 어디서 연결될지 모를 네가 더 이상 없는 이 세계에서 나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너의 고통과 죽음을 직간접적으로 지켜본 나의 하루는 지금 어떻게 다른가? 이 황망한 상실을 경험한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애도는 강력한 정치적 자원이다. 우리가 “여전히” 애도하는 것은 멘탈이 약해서도 아니고,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몸이 반응해서도 아니고, 특별히 그들과 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인 것도 아니다. 사회적 억압이 강할수록 애도의 힘 역시 강해진다. 상실의 아픔을 겪으면서 우리는 무책임한 권력이 우리를 어떻게 방치할 수 있는지를 보았고, 이 아픔이 단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고, 이같은 상실이 계속 반복되리라는 것을 직감한다.
애도가 transformation 이라면,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정치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네가 없는 나”는 “근본적으로 달라진 나”라는 점을 이해하는 정치, 즉 우리가 서로의 삶에 들어와있다는 점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정치다. 타인을 위해 아파하고, 모두의 취약함을 걱정하고, 따라서 함께 폭력에 맞서는 정치다. 물론 지금 내 정치의 상대는 당연히 국가폭력이다.
우리에게는 애도의 정치가 필요하다. 함께 슬픔을 공유하자. 서로의 목격자가 되자. 그리고 잡은 손을 절대로 놓지 말자. 애도의 정치는 이미 시작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