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삼국지 (권석준, 2022, 뿌리와이파리)
저자는 반도체의 기술적 백그라운드(공학박사, KIST 연구원 및 공학교수)를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매우 이례적으로 경영, 경제 및 지정학적 관심과 식견도 겸비하고 있다. 부제가 ‘글로벌 반도체 산업 재편과 한국의 활로’인 이 책은 반도체 현장의 엔지니어보다는 기업 경영자, 산업 정책 입안자들에게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파편적으로 알고 있던 것을 종합할 수 있었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어서 매우 유익했다. 몇 가지 주관적인 메모를 남긴다.
1. 기술 맹신
우선 저자가 제시한 일본의 실패와 한국의 성공 요인은 일반인의 피상적 생각에 반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일본은 평생 한가지 일에 몰두한다는 잇쇼켄메이(一所懸命) 정신에 기반한 일관성 중시 문화 때문에 과거의 성공을 더 정교화하는 것에만 매달렸다.
이는 기업 내부적으로는 ‘연구개발인력이 주도하는 기술 맹신 문화’로 나타났고, 이것이 급변하는 반도체 기술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에 관한 생생한 사례들이 많이 나오는데 일본의 갈라파고스화를 상징하는 가라케(ガラパゴス携帯電話)와 가라스마(ガラパゴススマホ)도 황당했지만, 개인적으로는 NTT-NEC의 기술보증기간 사례는 놀랄 지경이었다.
일본 제일 통신기업이었던 NTT는 80년대 중반 통신용 칩셋과 메모리 반도체를 주문하면서 25년간 고장이 나지 않을 것을 요구하였고, NEC 등 일본 반도체 업체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이를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반도체 신제품은 5년도 안되어 시장에 퍼지니 25년 무고장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고 신기술을 도입하는데 투여해야 할 자원이 엉뚱한 데 낭비한 것일 뿐이었다. 이를 NTT와 NEC도 틀립없이 알았을 텐데 ‘무의미한 작업에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들이는 것’이라는 문제제기 없이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우리는 (적어도 한때의 나는) 반대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나? 기초과학 중시, 대를 이어가면서까지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온 기술 계승의 전통, 개발 인력에 대한 존중으로 일본이 세계적으로 탄탄한 산업경제를 일궈가는데, 한국은 얄팍한 응용에만 매달리고, 뿌리 깊은 기술을 무시하고 유행에 편승하고, 마케팅과 재무 인력들이 엔지니어 머리 꼭대기에 있고, 이런 비판들이 넘쳐나지 않았나?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각각 장단점이 있는 것이지, 한국적 특성을 굳이 자탄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이제 와서 일본적 특성을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일소에 붙여서도 안될 것이라 생각한다.
2. 팹리스와 파운드리
전통적으로 반도체 기업은 설계와 생산이 분리되지 않았던 집약 소자 제조(IDM: Integrated Device Manufacturing) 방식이 주도했지만 1980년대 들어 미국에서 설계 주력 회사(Fabless)와 수율 및 공정에 집중하는 파운드리(Foundry) 업체로 분화되기 시작했는데, 일본 기업들은 IDM 방식의 종합반도체로 남았고, 이것 역시 일본 반도체 회사들의 발목을 잡은 것으로 제시된다.
당시 삼성반도체와 금성반도체도 역시 설계에서 생산까지 분리하지 않는 IDM 방식을 채택했고, 지금 삼성은 파운드리업에도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반면 대만은 TSMC가 세계 파운드리 시장에서 독보적 지위를 갖고 있다.
이것은 경영학에서 수직계열화를 둘러싼 전통적 논의인 make-or-buy decision과 관련되어 있는데, 나는 조금 다르게 산업생태계 또는 일자리 측면에서 생각하고 싶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고부가가치인 개발 또는 설계라는 블루오션에 집중하고, 대량 생산은 저부가가치 레드오션이므로 후진국에 넘겨줘야 할 것으로 치부하는 주장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주로 예를 든 것이 미국이었고 우리도 어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반도제 산업에서 파운드리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며, 그 자체로 부가가치 생산이 크고 또한 많은 일자리를 창조하는 중요한 영역이라는 인식이 확대되고 있다.
이것은 꼭 반도체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바이오 산업에서도 신약 연구개발 업체와 양산을 담당하는 생산대행기업(CMO: Contract Manufacturing Organization)이 분리되고 있으며, 한국의 삼성바이오로직스, 셀트리온 등이 CMO 시장에서 맹활약 중이고, 심지어 최근 신기술로 각광을 받고 있는 소형모듈원자로(SMR: Small Modular Reactor) 분야에서도 미국의 업체들은 스스로를 테크-프로바이더 역할에 한정하고, 디벨로퍼나 제품 프로바이더는 양산업체를 미국 밖에서 찾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한국 기업의 활약을 기대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각 산업의 최첨단 설계 및 개발에만 집중하려는 경향은 미국에 고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얘기가 샜는데 다시 반도체로 돌아와서, 삼성이 과연 파운드리 분야에서 더 약진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 대해서, 저자는 삼성이 직면한 근원적 어려움을 지적하고 있다. TSMC는 전문 파운드리업체이기 때문에, 사훈인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를 지킬 수 있고, 이것은 모든 고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중요한 카드이다.
반면 삼성은 고객이 주문한 반도체를 양산해서 공급하는 파운드리 외에도 설계에서부터 제조까지 다 수행하는 종합반도체 회사일 뿐 아니라, 휴대폰부터 가전까지 온갖 전자제품과 부품을 생산하는 업체라서 고객은 삼성에 칩을 주문할 경우 자사의 정보가 경쟁 업체인 삼성에 넘어가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데 애플의 경우 아이폰에 장착될 칩을 TSMC에는 안심하고 주문할 수 있지만 삼성에 주문하여 아이폰 용 칩의 스펙을 제공할 경우 삼성의 갤럭시 스마트폰에 이용될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자는 이에 대한 해법으로 ‘고객사와의 파트너쉽을 강화하기 위해 분사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고 하는데, 분사의 의미가 무엇일까? 파운드리 사업부의 매각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물적분할을 통해 삼성전자의 자회사로 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SK하이닉스가 100% 자회사 형태로 파운드리 사업부를 독립시켰다’라고 언급하는 것을 보면 후자인 것 같은데, 이것으로 고객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회계적으로도 그렇고 기업지배구조의 측면에서도 그렇고 파운드리 사업이 삼성전자의 사내 사업부로 있는 것과 100% 자회사로 있는 것은 실질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따라서 삼성이 TSMC 스타일의 독립된 파운드리 기업을 만들려면, 외부 매각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 삼성의 이해에 맞는지 또 국내 반도체 산업 생태계에서 가능한 것인지 상당히 복잡하고 큰 이슈이다.
3. 지정학
엔지니어 출신인 저자가 공학적 측면에만 머물지 않고 지정학까지 함께 고려한 것은 반도체 산업에 대해 입체적인 시각을 갖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지정학적 측면은 워낙 불확실성이 높고 예측하기 어려운 분야라, 저자도 다른 측면에 비해서 훨씬 더 예측에 조심스럽고 단서를 많이 단다.
그래도 굳이 저자의 입장을 정리해 보면, 현재 (1) 현재의 반도체는 1970년대 석유만큼 국제적으로 중요한 지정학적 핵심 요소이며, (2) 미중 갈등은 격화될 것이고 이에 따라 적어도 첨단 반도체 분야만큼은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동맹과 중국 사이에 공급망이 분리될 가능성이 높고, (3) 중국은 스스로 공급망을 완비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겠지만, 중국의 경제 형편 및 반도체 기술의 특성에 비추어 성공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내가 이 점을 평가할 입장은 아니지만 감으로만 얘기하자면 나는 이보다는 더 유보적이다. 두번째 사진은 글로벌 반도체 수요 공급을 요약한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의 차트인데, 여기에서 보면 한국, 대만, 미국, 일본 4개국 각각에서 만들어진 반도체의 최대 수입국은 모두 중국이다.
결국 반도체 생태계의 완전한 분리가 이루어지면 미국과 그 동맹국 반도체 기업은 모두 최대 소비시장을 잃게 된다. 물론 미국은 이런 극단적인 상황이 아닌, 최첨단 반도체 분야에서만 중국을 고립시키고 싶겠지만, 첨단 반도체에서 배제가 강화되면 중국은 엄청난 구매자의 지위를 이용해서 각사를 공략하지 않을까?
반도체가 아무리 독특해도 여전히 매뉴팩처드 프로덕트라는 점에서 나는 1970년대 석유와 유사한 모습을 보일 것 같지는 않다(심지어 석유조차도 OPEC 담합이 쉽지 않았고 장기지속될 수 없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커머더티가 아닌 이상 결국은 공급자가 아니라 소비자가 갑이라는 것이 내 감이다.
2019~20년에 국회에 근무할 때 갑작스레 닥친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제한 때문에, 날밤을 세우고 반도체 협회, 대형 반도체 기업, 소재 공급 기업, 대학 연구진 등 다양한 분들을 순차적으로 만나서 현황을 파악하고 의견을 청취하던 것이 기억이 나서 개인적으로도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당시에 이 책이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도 들고. 외국에서는 크리스 밀러의 신간 Chip War가 화제인데, 누가 빨리 번역해주면 좋겠다. 같이 읽어보고 싶다.
출처 : 신현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