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글 )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은 기존 이순신 영화들의 문법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게으른 영화다. 게다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오인도 심하다. 새로움이 없지만 여전히 이순신 신화와 거북선 신화에 기대면서도 이순신을 성웅화 시키지 않아 거부감이 들지 않게 만든 영악한 상업 영화다. 영화는 새로움이나 작품성 보다는 흥행을 택했다. 투자자들의 이익을 뽑아 주어야 하니 당연한 귀결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영화는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영화를 보기 전, 이순신 장군이 어찌 그려질까 궁금했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 <한산>의 진짜 주인공은 이순신 장군이 아니었다. 오히려 제 1 주인공은 거북선이었다. 어째서 부제가 용의 출현일까 궁금했었다. 한산해전의 승리로 구국의 영웅으로 떠오른 이순신을 용으로 묘사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아니었다. 용은 거북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화도 한산해전도 거북선이 다 했다. 기존의 이순신 영화와 다른 점은 이순신을 성웅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점과 이순신과 거북선이 공동 주연이라는 점뿐이었다.
임진왜란 해전사에서 거북선의 역할은 작지 않다. 하지만 영화 < 한산>에서처럼 실제 한산해전에서도 거북선이 그토록 큰 역할을 했을까? 거북선 3척이 거의 모든 적함을 격파한 것일까? 거북선이 아무리 뛰어난 전함이라 하더라도 단지 3척의 거북선이 73척이나 되는 왜군 전함들 대다수를 주도적으로 격파할 수 있었을까?
거북선은 돌격선으로 적진을 교란 시키는 역할이 주임무였지 주력 전함은 아니었다. 그런데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은 거북선이 한산해전의 승리를 이끌어낸 주인공처럼 묘사한다. 이는 거북선에 대한 지나친 신비화고 심각한 역사 왜곡이 될 수도 있다. 한산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주력 전함 판옥선 50여척은 그저 조연에 불과했단 말인가? 판옥선의 병사들과 전투의 숨은 주역인 노꾼들은 그저 거북선의 들러리에 불과했던 것일까? 영화 <한산>은 거북선을 제외한 판옥선들을 그저 성벽을 쌓는 돌처럼 만들어 버렸다.
조선왕조실록의 <한산해전>에 대한 기록에는 거북선 이야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거북선이 해전의 주도적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오히려 학익진을 치고 있던 판옥선들이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1592) 6월 21일 4번째 기사>
게다가 영화 <한산>은 한산해전 승리의 주역인 판옥선의 공을 축소한 것도 모자라 판옥선의 역할을 그저 보조적인 역할로 축소하고 있기까지 하다. 바다 위에 쌓은 성, 바다 위에서의 수성전이란 이야기에 집착한 나머지 판옥선의 실제 기능을 없애버렸다. 판옥선을 그저 바다 위의 성벽처럼 꼼짝 못하게 고정시켜 버렸으니 판옥선은 본래 기능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성벽으로 서서 거북선의 활약만 지켜보며 포 몇방 쏘다가 끝나고 말았다.
이순신이 학익진 전법으로 왜적 함대를 전멸 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단발인 대포를 연발로 쏠 수 있게 만든 판옥선의 구조가 가진 위력적인 기능 때문인데 영화는 판옥선의 기능을 성벽 기능으로 왜곡시키고 말았다. 그러니 한산 해전 승리의 원인도 잘못 표현하고 말았다. 전짜 한산해전에서도 판옥선이 성벽처럼 굳어 있었다면 전투는 실패 했을 것이다.
왜일까? 한산해전에서 개인화기인 조총은 왜적이 우세했지만 함포는 조선군이 우세였다. 그러나 화약에 불을 붙여 철환을 날리는 함포 공격은 다시 포를 쏘는 데까지 중간 간격이 너무 길었다. 함포 사격이 주력인 조선으로서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판옥선이 한 방향으로 서 있기만 했다면 다시 조준을 준비하는 사이 돌격해오는 왜선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함포 공격의 불리한 조건을 극복시켜준 것이 바로 판옥선의 구조였다. 판옥선은 앞쪽 뿐만 아니라 옆과 뒤에도 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판옥선은 속도가 느린 대신에 360도 급회전이 가능했다. 앞쪽에서 포를 쏘면 배가 바로 돌면서 옆쪽 포문에서 연달아 포탄을 쏟아냈고 다시 뒤쪽, 옆쪽으로 쉬지 않고 이어졌다. 1척이 앞쪽에서만 포를 쏘는 전함 4척의 몫을 해냈다. 반면에 왜선은 선체가 길고 바닥이 뾰족한 첨저선이라 속도는 빨랐으나 급회전이 불가능했다. 그러한 판옥선에 날개에를 달아 준 것은 학익진이었다. 이순신이 학익진 전법을 택한 것도 그러한 판옥선의 기능을 최대할 활용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판옥선들이 학 날개처럼 펼쳐져서 왜선을 포위하고 360도 회전하며 연달아 포를 쏘아대니 왜선은 감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영화 <한산>에서처럼 판옥선들이 꼭 붙어서 바다의 성벽 역할을 했다면 360도 회전하며 함포를 쏘아대는 기능을 발휘 할 수 있었겠는가? 어림도 없는 소리다. 하지만 영화는 거북선을 영웅화시키기 위해 진짜 한산해전 승리의 주역인 판옥선을 들러리로 만들어 버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항변으로 정당화 될수는 없다. 역사적 사실을 재현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가상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영화화 한 것이니 기본적인 사실관계는 왜곡시키지 않고 상상력을 가미하는 것이 옳다.
한산해전 승리의 결정적 요인인 판옥선이 회전을 할 수 없도록 성벽을 쌓듯이 붙여 놓은 것을 어찌 영화는 영화라고 정당화 할 수 있겠는가. 회전을 못하면 판옥선이 연방 사격 능력을 발휘할 수 없고 그리되면 한산해전에서의 승리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엄연히 판옥선을 활용한 승리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부정한 것이니 영화이기 때문이라고 감싸줄 여지가 없는 것이다.
오랫동안 조선 전함은 평선(平船)인 맹선이었는데 왜선의 규모가 커지고 화력이 강해지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명종 10년(1555년)에 새롭게 개발한 전함이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은 2층 구조의 높은 배였으니 왜구들이 쉽게 기어오를 수 없었다. 왜구들의 장기인 배에 올라 백병전을 전개하기가 쉽지 않은 구조였던 것이다.
또 높은 구조의 판옥선에서는 아래를 향해 활을 쏘기 유리했고, 함포의 포좌 또한 높아 명중률도 높았다. 판옥선의 승선 인원도 130명이나 됐으니 노를 젓는 노꾼의 수가 많아 상황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기동성과 견고함을 동시에 갖춘 전함이었던 것이다. 그런 판옥선의 50여척의 역할을 왜곡시키고 단 3척의 거북선이 전투의 주역인 것처럼 만든 것은 또 다른 영웅사관에 다름 아니다. 결국 영화는 흥행을 위해 역사를 버렸다.
한산해전이 갖는 해전사적 의미 중 하나는 이 전투에서 본격적인 함대 함 전법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한산해전 전까지는 해전이라 해도 육전의 연장에 불과했다. 전함끼리 머리를 대면 배에 올라 1대1 전투를 했다. 그런 싸움에서 100년의 전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단병술과 칼싸움의 고수가 된 왜군에게 물고기 잡고 농사짓다 입대한 조선 수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은 함대 함 전법을 통해 병사들끼리 직접 싸우지 않고 전함끼리만 싸우게 했다. 학익진 전법은 함대 함 전법의 전형이고 근대적 전법의 시작이었다. 임진왜란 중 한산해전의 또 하나 의미는 전면전에서 최초의 승리였다는 것이다. 한산해전 전에도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그것은 기습전이었다.
결국 판옥선의 막강한 활약과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을 통한 탁월한 전투 지휘로 조선수군 전함 56척은 손실 없이 왜군 전함 73척 중 59척을 격침시키고 9000여명의 왜군을 수장 시킨 대승을 거두었다. 또 이틀 뒤인 10일에는 창원 안골포에 있다 나온 왜선 42척과 마주 싸워 이 또한 섬멸시켜버렸다. 전면전을 통한 한산해전의 승리로 조선군은 자신감을 완전히 회복했고 패색이 짙던 임진왜란의 전세를 완전히 역전 시켜버렸다.
영화는 이순신이 항왜의 질문에 이 전쟁은 “의와 불의의 전쟁”이라 대답한다. 이 또한 감독의 게으른 대답이다. 장군의 전쟁은 백성을 살리기 위한 전쟁이었다. 왜적에 의해 수십만만명이 살상당하고 노예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당하는 상황에서 백성들 또한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위한 전쟁이었다. 전쟁은 의를 위한 관념의 전쟁이 아니라 생명을 지키기 위한 현실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의와 불의의 싸움이라고 그리 공허한 대답으로 퉁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순신이 기습전 전술을 버리고 위험부담이 크고 아군의 사상자가 많이 날 수 있는 전면전을 택한 이유도 백성들 때문이었다 한다. 기습전을 하다 보니 왜군들이 배를 버리고 뭍으로 도망가면서 백성들을 살육했다. 그래서 바다 한가운데로 왜군을 불러내 전면전으로 몰살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불가피하게 기습전을 하는 경우에도 꼭 몇 척의 배는 남겨줬다. 도망갈 퇴로를 열어둔 것이다. 그래야 백성들의 피해가 적었다.
그 전투가 백성을 희생할 것 같으면 왕의 명령도 단호히 거부했다. 백성을 위한다는 그것이 왕의 미움을 산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왕에게 백성은 왕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으니 백성을 왕조보다 우위에 두는 이순신의 애민 정신은 왕의 증오를 사고 불안을 부추기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오늘 전쟁의 흔적은 간데없고 한산도 바다는 더없이 맑고 푸르다. 인류의 사전에서 전쟁이란 단어가 사라져버릴 날이 올 수나 있을까. 이순신 장군도 그런 날을 꿈꾸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순신 장군을 전쟁영웅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나그네는 장군이 전쟁영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군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싸우지 않았다. 백성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건 평화를 지키기 위한 고투였다.
흔히 전쟁영웅들은 국가나 왕조를 위해 백성들을 희생시키는 행위를 정당화했다. 백성을 죽이더라도 왕을 위한 전쟁의 승리가 무엇보다 최우선이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그들과 확연히 달랐다. 장군은 왕조의 존속보다 백성의 안위와 평화를 우선시했다. 그래서 끝내 무능한 왕의 눈 밖에 났고 핍박을 받았다. 그러니 장군은 전쟁영웅이 아니라 평화영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산해전에서 배워야 할 것은 장군의 평화정신이고 애민사상이다. 더불어 잊지 말아야할 것이 있다. 우리는 곧잘 간과 하지만 장군이 공을 이룬 것은 수하 장병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란 사실이다.
“한 장수가 공을 이루려면 만 사람의 뼈가 마른다(一將功成萬骨枯)”
<당나라 때 사람 조송(曹松) 칠언절구 ‘기해세(己亥歲)’에서>
뼛속 깊이 새겨야 할 말씀이다. 하지만 영화 <한산>은 투자자들의 이익을 위해 만 사람의 뼈를 수장시켜버렸다. 가슴 아픈 일이다.
#한산용의출현 #한산해전승리의주역판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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