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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tgpt 기술탐구

ChatGPT와 구글 BARD의 차이점, 상상초월하는 성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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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tGPT와 구글 BARD의 차이점:

어떤 교수분은 본인에 대해 ChatGPT와 구글 BARD에 대해 물어보니, 구글 BARD가 훨씬 더 정확하게 대답하였기 때문에 구글 BARD 성능이 더 좋다 말하는데, 이는 맞는 이해가 아닙니다.

ChatGPT에 대해 어떤 사람에 대해 물으면 자기가 학습하고 기억한 것을 가지고 즉시 대답합니다.  따라서 이런 답은 틀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인공신경망은 외우기에 약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BARD는 먼저 인터넷을 서치하여 모은 결과를 다시 AI언어모델에 넣어서 답을 하는 것입니다.  둘의 차이가 명확합니다.

ChatGPT는 closed book으로 시험을 보는 것이고, BARD는 인터넷을 뒤져가며 시험을 보는 것입니다.  BARD의 경우 따라서 장점은 훨씬 더 정확하고 최신의 정보도 업데이트 된 것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단점은 서치 단계가 들어가니까 시간이 더 걸립니다.

참고로 BING AI도 이렇게 서치한 결과를 다시 언어모델로 처리하여 답을 냅니다. 이 때 GPT-4를 사용합니다.

순수 언어모델로서의 성능 비교는 여러가지 능력에 대해서 봐야 하기 때문에 복잡합니다.  나는 추론능력이 가장 중요한 척도로 생각합니다. 추론은 주어진 정보에서 답을 찾는 것입니다.  추론능력을 비교한 것은 나중에 올리겠습니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100000998149595/posts/pfbid0Bjekk9W2Ka5asy1jqUnBcK572b9rmcKH26MQ7rtXD4wV7dLkCrxEiXeuTLq25CDbl/?mibextid=Nif5o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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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래서 바드가 좀더 버벅 거렸군요


챗GPT가 훨씬 안정적으로 잘 만들었나?

아니면 마이크로소프트가 최적화 잘했나?

생각했는데... 서로 동작방법이 다르군요

나중에 어떤식으로 발전할지 궁금해지네요 ㅋㅋ


일단 우리나라 대기업처럼

중소기업 제품뺏어와서 본인꺼라 주장하진 않은 모양입니다

서로 각자 무기를들고 독자적인 개발했다는게

위 내용만 보더라도 느껴지네요


도전하는게 멋진 미국기업

미국주식에 비중 더 크게 늘리고싶은데

갑자기 악재 펑 터질까봐....무서운데...

항상 보고있으면 감탄이 절로나옵니다

고평가 버블 버블 그러는데...

이런 기업들은 당연히 그런평가 받을 수 밖에 없는것 같다는...


물론 그래도 테슬라가 ㅠㅠ 더 마음에 드는데

주가움직임이 둔탁해서 슬프네요


일론머스크의 예언대로

5년안에 시가총액 1위가는지는 한번 기다려봐야죠...








펌 <내 맘대로 읽은 헤이세이사 독후감>

요나하 준의 <헤이세이사>를 읽고 간만에 정성껏 독후감을 쓰려 했는데, 지금 기분이 별로 안좋다. 칼럼에 쓰는 글 빼곤 페북 같은 글은 이동할 때 휴대폰으로 잠시 끼적거리는데, 공항에 잠시 대기하면서 커피 한잔과 함께 쓸까 한다. 쓰면서 내 불편한 마음도 가라앉길... 준 짱, 미안해...

지적 배경

요나하 준의 글쓰기는 그 지적배경이 매우 흥미롭다. 근현대 사학자이긴 한데, 문화사, 미시사의 지적 배경이 강하고 일본의 사상계, 미디어, 정치, 문화와 사회심리를 관통하는 통찰력이 유니크하다. 세상에 뛰어난 사람은 많고, 광대한 사상가도 많지만 유니크하다는 건...내가 누군가에게 이런 찬사를 하게 되니 그게 얼마나 깊은 애정과 찬탄을 담은 말인 줄 알겠다. (부끄럽지만, 살면서 몇몇 훌륭한 분들한테 나도 유니크하다는 얘길 들었던 적이 있는데, 나는 그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고...이제서야 그게 어떤 마음인지 이해가 되서, 뒤늦게 감사하다..)

대중성을 담은 최첨단의 문화사회학 저술로서 <헤이세이사>의 한계에 대해 굳이 몇가지 지적하자면 상대적으로 저자의 경제, 산업의 다이내믹스에 대한 이해는 (어쩔 수 없이) 제한적이고, 이웃나라인 중국, 한국에 대한 사회문화적 이해 역시 자국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에 비하면 피상적인 편이다. 그러다보니 편견이 묻어 있는 서술도 엿보이는데, 언제 저자와 대화를 할 기회가 생기면 범아시아적인 전망으로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이나 중국이) 일본에 비해 지적하신 문제적인 면이 분명 있지만 그 나라 내부에는 보기보다 훨씬 다양한 균열이 존재해서 최근에는 표현하신 고정관념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역동성도 감지됩니다"라고 한마디 건네고 싶다. 서구세계와 관련된 기술에도 약간 기시감이 느껴지는 뉘앙스가 있는데, 근대화=서구화를 동일시했던 일본의 역사적 컴플렉스도 불가피하게 반영되어 있고, 내 느낌으론 저자 스스로 서구세계에서 살아보면서 그 컴플렉스로부터 자유로워질 기회도 제한적이었던 듯하다.

역사학자인 저자가 미시사를 주로 어떤 텍스트로 공부했을까 궁금해지는데, 나처럼 서구의 영향권에서 공부한 사람은 린 헌트 같은 서구의 문화사가들한테 큰 영향을 받았지만, 책에 인용된 내용들을 보니 일본은 미시사, 문화연구, 기호학 분야에서 일본만의 독특하고 풍부한 담론과 학제적 전통이 축적되어 있는 듯도 하다. 하긴, 롤랑 바르트가 찬탄했던 기호와 미디어의 제국이니.. 어쨌든 일본의 학제적 전통에서 긍정적인 요소들을 자기만의 것으로 추출하여 사상(철학)-문화와 미디어-사회심리-기호-정치를 연결하는 독특한 해석의 고리를 제시한다. 저자가 본인의 분석적 시각을 개념화하기 위해 차용한 사회심리학(정신병리학) 지식은 주로 (일본화된) 2차 텍스트들을 인용하는데, 에고가 강한 유럽의 사회심리학자들이 이 책을 읽었다면 분명 '저자의 사회심리학 개념에 대한 이해가 얕다'고 잘난 척 한마디 했을 것 같다. 그러나 저자 본인이 일본 사회의 내밀한 변동상에 대해 체화한 문제의식을 적절히 표현하는 언어로는 무리가 없다.

사실은 책을 읽으면서 저자에 대한 애정이 커졌고, 그래서 찬사만 하게 될까 서두에 일부러 눈에 띄는 한계부터 언급해봤다. 인용된 일본의 사상가, 집필자, 문화인, 정치인, 사건의 목록이 방대하고 내가 일본을 잘 아는 것도 아니라 그 내용과 내밀한 맥락을 전부 이해하고 소화하기는 어려웠다. 만약 번역본의 개정증보판이 나올 수 있다면, 인물과 주요 사건에 대한 해제가 별첨 부록으로 수록되면 좋을 것 같다.

일본이 몰락한 과정

내 나름으로 이해한, 요나하 준이 조망한 헤이세이사는 '두 아버지의 몰락을 대체할 어른이 부재한 사회의 파편화와 언어의 쇠퇴, 육체의 동물화 혹은 유아화'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본 군국주의를 배태했던 전통사회의 가부장적 에토스(아버지 1)와 전후 맑시즘을 중심으로 한 전공투 세대의 남성상(아버지 2)이 모두 그 한계를 드러내면서 몰락해갔다. 80년대 후반부터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사적 조류는, 사실 그런 각기 다른 아버지들이 담지했던 로고스(logos) 중심주의의 한계를 드러내고 사회문화의 다원주의를 지향한 면에서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나하 준도 그 가능성마저 부정하지는 않는데, 90년대를 풍미한 아무로 나미에 같은 여성 예술인들이 내비친 전통적 가부장주의에 대한 '쿨한' 태도는 일본에서도 꽤나 도전적인 것이었고 전통사회와 마찰을 일으켰다. 그러나 문화의 대세가 넘어가고 있다는 시대감각을 공유했다는 면에서 '사회가 진보하고 있다'는 찰나의 느낌도 주었던 것 같다.

문제는, 철학과 사상의 장이 너무 작고 가볍고 극단적인 상대주의로 치달으면서 사람들이 지난 수십년간 국가와 사회가 나아갈 방향성마저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거대 서사와 역사에 대한 성찰, 혹은 역사성 그 자체가 사라진 일본 사회에서 제멋대로 파편화되는 것이 마치 포스트모던한 쿨함인양 인식되었다. 제각기 잘난 척 떠드는 논객들이 많아졌고, 나름 진중했던 사람들조차 리버럴리즘의 언어적 이상이 신자유주의와 소비주의의 육체적 아비투스(habitus)로 수렴된 풍조 속에서 자기 담론을 가벼운 포장지의 상품으로 만들어 시장에 투척하기 시작했다. 지식인의 전향은 좌파에서 우파로가 아니라, integrity에서 disintegration으로의 이동을 통해 일어났다. 아무도 자기 말에 책임을 지거나, 질 필요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그때그때 담론의 상업화가 중요해졌고, 적당히 진지하거나 쿨한척 떠들어도 실제 하는 행동은 위선적이거나 후진 경우가 많았다. 그 자체가 시대의 징후를 담은 행동패턴이었다.

몇차례 시도된 자민당 체제의 해체와 참신한 신당의 약진은 지식-정치의 장이 시대를 관통하는 어젠다를 찾지 못한 채 재난과 경제침체를 겪으면서 좌초했다. 한때 디지털 민주주의의 참신한 보루로 여겨졌던 인터넷과 SNS 역시 이러한 파편화와 책임 없는 말의 향연에 새로운 숙주가 되었다. 여과없는 혐오표현과 포퓰리즘이 득세했고, 방향성을 잃어버린 사회에 경제성장마저 정체되니 일반 사람들이 나름 좋았던 것, 나름 억울한 것에 대해 찰나적으로 반응하게 되었다. 전자는 고도 경제성장기를 구가했던 시기의 일본 아니면 전쟁 직전까지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끈 메이지 국가였고, 후자는 지나간 역사의 과오에 대해 끊임없이 가해지는 전체화된 비난과 법제적 강제(평화헌법)에 대한 부담이었다. 파편화된 사회에서 역사없는 삶을 구가하는 평범한 개인의 입장에서, 과거에 좋았던 것은 좋았던 것이고 현재에 부담스럽고 짜증나는 것은 짜증나는 것이니, 대중의 정서가 과거로부터의 책임성을 거부하고 우편향으로 움직인 것 또한 어떤 면에선 자연스러웠을 것 같다.

정치인과 미디어에 기생하는 플레이어들은 누구보다 이런 대중의 트렌드에 기민하게 영합했다. 아베든 고이즈미이든 더이상 '말의 무게'가 중요하지 않다. 그때그때 대중이 좋아할 만한 쇼를 하고 '뭔가 하고 있는 듯한 느낌'만 전달하면 된다. 국가의 거버넌스가 알맹이 없는 쇼 윈도우(facade)가 되어버렸다. 요나하 준이 전후에 전통 일본의 마초상을 대변하고 할복 자살한 미시마 유키오를 '근대 고릴라'라 부르며 그 허구성을 냉소했지만, 텍스트가 죽은 사회에서는 우타다 히카루 같이 가볍고 경쾌하게 춤을 추되 아무 내용은 없는 소리를 내뱉어도 나라를 이끄는데 아무 지장이 없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론 책을 읽으면서, 정치인 아버지의 쇼맨십을 극단화한 아들 고이즈미 신지로의 동어반복, 혹은 '펀쿨섹좌' 어법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고, 일본 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었는지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9세기에 서구가 잘 했던 것을 빨리 따라가서 더 잘하는 것이 일본식 근대화의 목표였는데, 롤 모델이었던 서구 사회는 근래에 눈에 띄게 후져졌다. 자유주의도, 사민주의도, 민주적 거버넌스도 더이상 작동하지 않는 모습이 미국의 트럼피즘과 유럽 극우의 득세로 명백해졌다. 사회 진보의 방향성을 잃어버린 국가에서 테크놀로지 혹은 개별 기술에 대한 관료와 언론의 맹목적 숭배, 혹은 페티시즘(fetishism)이 국가 차원의 전략과 거버넌스에 대한 숙고를 덮었다. 내 해석을 얹자면, 일본은 관료와 엔지니어들이 '쿨 재팬', '테크놀로지 no.1'만 외치면서 기존의 지배질서와 관성을 재생산했고, 그래서 근본적인 혁신과 구조 변화의 기회를 놓쳤다. 아직 제조업의 기반은 탄탄하지만, 선망할만한 정신과 문화의 콘텐츠가 더이상 형상에 담겨있지 않게 되었다.

앞으로 한국은?

내가 일본의 역사와 현재에 주목하는 이유는 일본인들이 지나간 발자국이 대부분 한국인들이 지나갈 길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한세대의 시차를 두고 한국은 일본이 하던 일을 꼬박꼬박 따라했다. 최근에는 대략 10년, 짧으면 5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사회문화의 트렌드가 답습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이 일본식 근대화 모델을 추종해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요컨대, 발전국가이든 사회주의이든 메타담론의 이상이 사라지고 나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보다 리버럴하고 다원적인 세상이 열리는가 싶었는데, 파편화된 사상계에서 자기 말에 책임 안 지고 쿨한 척하는 지식인과 미디어 플레이어들만 스크린과 유튜브에 득세하고, 사람들은 방향을 잃은 채 돈과 소비주의에 대한 지향만 남아서 '쿨병'에 걸려있다가, 거버넌스는 근본적인 개혁과 구조변화의 타이밍을 잃고 경제가 가라앉으면서 시대의 우울에 빠지고, 다중이 안게 된 그 우울함과 분노, 자기 방어기제의 지점을 영리하게 건드리는 정치인들이 자기 계파만의 이익을 취하며 사회와 계층을 갈라놓은 게 현재까지의 일본 상황인 것으로 갈무리된다.

자연스러운 질문. 한국의 미래는 이런 일본의 현재를 그대로 답습하게 될까? 몇가지 차이점은 보인다. 1) 일본은 중선거구제가 소선거구제로 바뀌면서 중도세력과 정치적 중용의 공간이 사라졌다. 한국은 반대로 중도세력과 정치적 중용의 공간이 현재 부재한 상황에서 선거구제의 변화를 (아직까지는) 모색하고 있다. 2) 쿨한 척 조신(?)하고 가와이하게 소비주의에 빠져들었던 일본인보다는 한국인이 한결 경제적으로 탐욕스럽고 아직까지도 폭력적이다. 당연히 일본의 히키코모리보다는 더 가시적이고 집합적인 사회갈등이 표출되기 쉽다. 이런 사회구조의 특성이 한층 가학적인 지배체제의 공고화로 귀결될지, 너무 밟아서 어쩔 수 없이 꿈틀하는 대중의 역능으로 분출될지는 지켜봐야 한다. 3)  한국이 아직까지는 일본보다 덜 고령화되었다. 쬐끔 더 젊은 세대가 역사의 절벽 앞에서 마지막으로 조타수를 돌릴 수 있을지를 지켜볼 시간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

한국이 일본의 궤적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못한 점? 비슷한 점은 너무 많으니 언급을 생략하자. 가장 아프게 다가오는, 한국이 일본보다 근본적으로 뒤쳐져 있는 점은, 그래도 일본에는 요나하 준 같은 진중한 젊은 지식인들이 아카데미를 뛰쳐나오면서 새로운 성찰의 장을 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시대의 우울을 한껏 몸에 진 채, 그 우울을 극복하고자 자기 몸을 공공과 시대의 정신에 헌신하면서. 담론의 파편을 가지고 놀거나 정치와 사회의 균열에 자기 몸을 담는 대신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이 배태되려면 지성사적인 축적이 전제되어야 할텐데, 그런 면에서 한국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는 언급하기 어려워진다.

어쨌든 아직까지는 살아있거나 새로 태어날 사람들이, 서구의 제국주의 역사와는 또 다를 새로운 하이퍼 모더니티(hyper modernity)의 요체를 계보학적으로 성찰하고 구현의 방향성에 대해 논의할 수 있었으면 싶다. 언젠가 그런 새로운 실천의 장이 동아시아에서부터 구현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날이 도래한다면, 저자가 언급한 오늘날의 모습을 후세의 역사가들은 '근대의 가을'이 아니라 도래할 하이퍼 모더니티의 봄날을 위해 인고한 '근대의 늦겨울'로 명명할지도 모른다. 진짜 하고 싶은 얘기들은 그때 그들과 나누고 싶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Hyo-jin Kim 이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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