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충동과 경제적 제도들에서 역사의 모든 원동력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이는 경제적 이유보다는 정치적 이유에서 였다. 자본주의가 앞으로 성공을 거둔다면 이는 그 경제적 여러 힘들을 길들일 정치적 의지와 정치적 수단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오늘날 개인으로서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게 되었다. 우리가 계속 부유한 나라로 살아갈 것이라는 주장에는 현존하는 사회 조직의 메커니즘이 계속 효과적으로 기능해줄 것이라는 전제가 암묵적으로 깔려 있는 셈이다. 우리는 부유하지만, 부유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부유한 것이지 개인으로서 부유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물질적 욕구의 충족을 당연한 것처럼 쉽게 생각하고 있지만, 우리를 하나로 엮어 전체 사회로 만들어주는 유대가 끊어진다면 그 또한 사라져버리게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산업 사회로 오게 되면 사회적 노력을 제대로 적재적소에 배치한다는 것이 엄청나게 복잡한 과제가 된다.
사회가 존속할 수 있으려면, 자연nature이 가하는 제약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도무지 쉬이 말을 듣지 않는 인간 본성human nature을 또한 이떻게 억제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인류가 생산 및 분배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방식은 오로지 세 가지밖에 없었다. 그 3대 경제 체제는 ‘전통’에 의해 운영되는 경제, ‘명령’에 의해 운영되는 경제, ‘시장’에 의해 운영되는 경제라고 부를 수 있다.
교역은 오래된 시기부터 중요한 것으로 존재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회의 부속물일 뿐이어서, 사람들을 생산 활동에 매진하도록 이끄는 기본적 동기 부여라든가 자원을 다양한 용도 가운데 어떤 것에 배당할 것인가 나아가 여러 사회 계급들 사이에서 재화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따위의 문제는 시장 과정과는 대개 분리되어 있었다. 즉, 고대의 시장은 그 사회의 기본적인 경제 문제를 풀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대의 시장은 생산 및 분배의 거대한 과정에 통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보조 수단에 불과했으며, 핵심적 경제 장치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둥둥 떠 있었던 것이다.
중세 사회와 그 경제생활에서는 경제적 활동이 아직 사회적 종교적 활동과 불가분으로 섞여 있었던 데에 반해 시장 경제에서는 경제생활이 그야말로 독자적인 특수 범주로서 나타나게 된다는 데 차이가 있다. 중세 사회에서는 경제가 삶의 지배적 측면이 아니라 종속적 측면일 뿐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유럽을 엄청나게 비옥하게 만드는 경험이었다. 토지에 기초한 예전 형태의 부는 이제 새로운 화폐적 기초와 맞닿게 되었고, 이 새로운 부의 기초가 훨씬 더 강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렇게 단지 더 부유할 뿐만 아니라 더 명랑하고 더 활력 넘치는 문명의 종재를 흘끗 보는 것만으로도 예전의 삶의 관념 자체가 완전히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십자군 전쟁은 타성에 빠져 정체되어 있는 사회를 흔들어놓음으로써 유럽의 경제적 전환의 속도를 올리는 데에 엄청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중세 시대의 충격적인 특징이자 경제 발전을 저해한 가장 큰 장애는 중세 특유의 칸막이로 정치적 권위가 구획되었다는 점이다. 유랑 상인들은 단 100마일만 지나가도 규칙, 규제, 법률, 도량형, 통화 등이 모두 다른 주권체들을 10개가 넘도록 통과해야 했다. 더욱이 국경마다 통행세를 뜯는 초소가 버티고 있기 십상이었다. 중세의 중기와 후기 동안 내부적으로 통일된 시장을 가질 수 있었던 나라는 전 유럽 나라들 중에서 오직 영국뿐이었다. 이는 영국이 최초의 거대한 유럽의 경제 대국으로 떠오르는 데에 크게 기여한 요인이었다.
칼뱅주의는 경제생활의 한 특정 측면을 크게 장려하였는데, 그 측면이란 지금까지 그 누구도 듣도 보도 못했던, 검약이라는 것이었다. 소득을 마음껏 써버리고 즐기지 않고 이를 의식적으로 삼가는 미덕이 바로 저축이라는 것이었다. 또 투자라는 것도 있었다. 저축을 생산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투자야말로 이윤의 도구일 뿐 아니라 종교적 경건함을 실천하는 도구라는 것이었다. 비록 다양한 전제 조건을 달기는 했지만 심지어 이자 지불까지도 너그러이 보아주었다. 사실상 칼뱅주의는 경제생활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낳은 것이었다.
중세의 근본적 변화에 있어서 중요한 특면 하나는 중세적 의무가 점점 화폐적인 것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예전에 현물로 지불되었던 중세적 공납이 이제는 서서히 화폐 조세와 화폐 지대로 바뀌었다. 이는 일시적으로는 영주들의 현금 사정을 좋게 해주었지만 곧 인플레이션이 닥치면서 농촌 귀족을 몰락시켰다.
고대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사람들을 노예로 소유하였다. 중세에는 농노 또한 주인의 재산으로서 여러 속박과 의무로 묶여 있는 몸이었지만, 그 소유권이 그렇게까지 전면적인 것도 아니었고 또 영주 쪽에서도 상호적인 의무를 져야 하는 관계였다. 근대 상업 사회에 도달해서는 ‘생산 요소’의 하나가 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수유하면서 이것을 가능한 한 유리한 조건으로 판매하게 되었다. 자유 노동자는 아무의 재산도 아님과 동시에 아무도 이들에게 의무를 갖지 않는다.
임노동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출현은 단지 지배계급이 귀족에서 자본가로 바뀌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부란 과시하기 위한 물건이 아니라 시장에 내다 팔 상품이라는 새로운 의미 또한 낳았다. 예전 사회의 피라미드, 성당, 건축물들과 달리 자본주의에서의 부란 시장에서 팔려 ‘실현’되기 전에는 아무런 지위도 얻지 못한다. 이렇게 자본주의의 경제생활에는 꼭 시장에서 팔려야만 한다는 지상 명령이 따라오기 때문에 그전에 볼 수 없었던 종류의 긴박성과 신경질적인 분위기가 그 공기 위를 떠돌게 된다. 요컨대 자본주의는 단지 사회 제도 몇 개의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경제 질서를 뜻하는 것이었다.
기술은 현대 공동체 내부의 경제적 상호 의존성을 크게 증가시켰다. 그리고 섬세하게 연결된 여러 활동들의 연결망은 갈수록 더 넓어지고 있으며, 사회의 경제적 문제의 해결은 이 연결망을 얼마나 매끈하게 조정해내느냐에 달리게 된 것이다.
- 로버트 하일브로너, 월리엄 밀버그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1962년에 처음으로 출간되어 13판의 개정을 거친 책...
https://youtube.com/shorts/Dv3uWOm4hBA?feature=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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