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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뉴스

윤석열이 국가모든 산업을 멸망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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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이정도면

국가를 몰락시키고

일본자본이 바닥매수로 대규모 지분투자하도록

열어주려는게 아닌가 싶음...

우리나라 카르텔들 하다하다 안된다 싶으면

그냥 일본인으로 귀화하고 싶으실것같네요

이 나라 바보몽충이들 구원해주려고 스트레스받는것보다

그냥 이완용이 되는게 세상...속편하긴 하겠음..

이렇게 멍청한 대텅령...

안된다고 막아야한다고 알려줘도

부동산투기한다고 뽑아놨으니...

ㅠㅠ 우리나라 망해가는 소리가 들리네요

뭔 짓을...꾸미고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돈으로 찍어누르는게...

가장 좋죠

IMF같은거...한번 제대로 비슷하게 만들어보려고 이러는게 아닌가 싶음


IMF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 과소비해서
혹은... 나리운영을 못해서라고 아는분들이 많은데...

가장 IMF가 오도록 우릴 밀어넣은 애들이

일본이었음

그때 금융전반적으로 다 폭락시키고

바닥에서 주워먹었죠

미국이 큰 이익을 본줄아는데

일본도 엄청난 이익을 봤었음...

한반도에 전쟁뿐 아니라

뭐든 위기가오면 일본은 싼값에

노동 , 기술 , 자본

미국처럼 다 뺏어감...

이유는 윤석열보면 알죠

걍... 한국인 탈쓴 일본매국노.... 민족반역자들이

여기저기 모든 기관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럼....


이정도면 진짜 바보가 아니라

고의로 이러고있다고 봐야함.


그나저나 미국증시 왜 갑자기 빠지지...슬프게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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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ㅣ 2023년 5월 17일, 나는 빛고을 광주에 있다.

80년 5월 광주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생 시절 '너머너머'라는 약칭으로 은밀하게 유통되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통해서였다.

작가 황석영 썼다고 알려졌지만 공동저작물이었다. 문병란 시인이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윤상원, 박기순 열사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쓴 장편 축시에 나오는 한 구절을 따서 책 제목이 만들어졌다.

대학교 신입생 때 처음 광주를 찾았다. 그 시절 각 대학 총학은 버스를 대절해서 학생들이 순례하듯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참배하도록 했다.

광주민중항쟁이 있고 10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그때 80년 5월 광주는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생생한 현재사였다.

스러진 사람들이 묻혀있는 곳은 망월동 공동묘지의 한 귀퉁이였다. 군사 정권의 서슬이 시퍼럴 때라 죽은 자들은 죽어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희생자 묘는 떼를 제대로 입히지 않아서 붉은 황토가 곳곳에 드러나 있었다.

광주에 가기 전 총학은 광주의 진실을 알려주는 비디오를 상영했다. 대학생이 되기 전에 이미 책으로 광주를 접한 나는 읽은 내용을 영상으로 확인하는 것이었지만 처음 영상을 본 또래들에게는 매우 큰 충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상영된 광주 영상은 영화 '택시 운전사'의 실제 모델인 위르겐 힌츠페터가 목숨을 걸고 촬영한 것이었다.

독일 공영방송 ARD 소속이었던 힌츠페터 기자는 완전히 봉쇄된 광주에 몰래 잠입해서 80년 5월 광주를 카메라에 담았다.

힌츠페터 기자가 광주에 들어간 날짜는 5월 20일 오후였다. 5.18광주민중항쟁이라는 명칭이 웅변하듯 가장 잔인한 진압은 5월 18일에 이뤄졌다.

전북 익산에 있어서 광주까지 제일 신속하게 투입될 수 있었던 제7공수여단 병력이 조선대와 전남대에 들이닥친 것은 5월 17일 오후 11시 경이었다.

5월 18일 자정을 기해 광주 일원의 모든 대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오전 10시경 전남대 재학생 100여 명이 정문 앞에 모여들었고 정문을 지키던 7공수 병력이 폭력 진압을 시작했다.

전남대 학생들은 공수부대의 만행을 알리고자 시내 중심가인 전남도청 앞으로 이동했다. 11공수 2개 대대 병력 또한 금남로에 투입되어 광주 시민들을 대상으로 '화려한 휴가'를 실시한다. 5.18 광주민중항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힌츠페터 기자의 카메라는 5월 20일 오후가 되어서야 돌아갔으니 5월 18일과 19일에 있었던 광주 시민의 처절한 저항은 영상에 담기지 않았다.

힌츠페터 기자는 5월 20일과 21일에 촬영한 영상을 가까스로 빼내 5월 22일에 바로 도쿄 나리타 공항으로 갔고, 기다리고 있던 도쿄 지국 스태프에 의해 영상은 서독으로 보내졌다.

ARD 방송국은 영상을 받자마자 편집해서 서독 전역에 방영했다. 80년 5월 광주는 그렇게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촬영한 필름만 서독으로 보냈을 뿐, 힌츠페터 기자는 다시 광주로 돌아갔다. 5월 21일 계엄군의 무차별 집단 발포가 있은 직후였다.

그가 다시 찾은 광주는 해방구였다. 시민군이 조직되었고, 시민자치공동체가 만들어졌다. 힌츠페터의 카메라는 놀랍도록 평온한 광주를 기록했다.

5월 26일에 두 번째 촬영본을 본국으로 보낸 후, 광주에는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전남도청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시민군에게 집중 사격이 가해지고 특공대가 진입한 것이 새벽 2시였다.

저항하는 광주 시민들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5월 26일 전두환과 신군부가 동원한 병력은 무려 47개 대대 2만여 명이었다. 이중 6천여 병력이 전남도청을 포위하고 시민군을 사살하는데 투입되었다.

힌츠페터 기자는 취재를 위해 모두 3차례 광주에 들어갔다. 1차, 2차와 달리 마지막 3차에는 시민군이 다 진압된 뒤라 취재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처음 두 차례 촬영한 영상으로 80년 9월에 '기로에 선 한국 Südkorea am Scheideweg'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다.

당시 서독에서 유학 중이던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들이 녹화를 떴고, 국내로 반입해 번역 자막을 달고 오디오를 입혔다.

1986년 5월 18일, 명동성당 청년회는 이 비디오를 몰래 상영했다. 힌츠페터 기자의 광주 촬영 영상이 6년 만에 한국에서 빛을 보게 되었다.

명동성당 청년회는 비디오 증폭기를 이용해 2천여 개의 복사본을 만들었다. 이 복사본이 다음 해부터 전국 대학가에서 상영되었다.

내가 1987년 5월에 본 광주 영상은 바로 힌츠페터 기자가 만든 다큐멘터리였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2023년 5월의 나는 힌츠페터 기자의 뜻을 기리는 '힌츠페터 국제보도상' 조직위 위원 자격으로 광주에 오게 되었다.

청년 시절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라고 목청 높여 부르던 오월의 노래 속 금남로를 이번에 처음으로 걸어보았다.

금남로와 충장로는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그렇게 크고 넓지 않았다.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었던 역사적 공간에서 군부 독재에 온몸으로 저항하던 광주 시민들을 떠올렸다.

시민군이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웠던 옛 전남도청 건물과 사진에서 자주 본 도청 앞 분수대, 그리고 전일빌딩은 오랜 세월에도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 세대에게 80년 5월 광주는 먼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동시대의 역사다. 그렇기에 우리 는 결코 5월 광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80년 5월 광주는 지금도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피해갈 수 없고 외면할 수 없는 질문을.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pfbid0mqZBHRsCBWNGWoa6MHkNj6PQEjFFJ48q2oFg5ossdwbPawUERMz9iPatNgBgzW5Hl&id=1015006661&mibextid=Nif5o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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