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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뉴스

광화문 슬픈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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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전쟁일 때 美軍은 광화문을 이렇게 폭격했고. 보신각을 이리 폭격했고 을지로 민가지역을 이렇게 아작낸다. 사찰이 불타고 교회가 불탔다. 미군을 위한 군사작전에  코리아의 어떤 문화재도 민가의 생존도 고려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성 베드로 성당에 비교될 수 있는 강원도 거진 건봉사 사찰이 있다. 석가모니 진신치아사리가 총11개인데  스리랑카에 3개가 있고  8개가 건봉사에 봉안되어 있다. 국보 문화재가 가득한 이 곳 건봉사는 신흥사, 낙산사, 백담사를 비롯해 31개의 말사를 갖고 있는 고려 조선을 잊는 최대사찰이었다.

이곳에는 7백여 명의 승려들이 상주하였고 임진왜란 시는 사명대사가 여기서 육천 명의 승병을 일으켰고 건물 766칸이 넘었고 암자도 8곳이 있었다. 천 오백 년 유지된 건봉사는 미군 4개 폭격기의 무차별 맹폭, 미7함대의 함포사격, 포탄 10만발로 후퇴하던 北軍을 전멸시키고자 했다고 하지만 결과는 국보421호 금니화엄경 46권과 사명대사유물, 수많은 보물들 역사적 가치가 너무 소중한 것들이 소멸되었다.

더욱 전쟁이후 이곳에 상주한 軍은 남은 사찰의 목재들을 땔감으로 사용하여 역사와 문화의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래서  향로봉전투를 미화시키는 것에 나는 반대한다. 코리아전쟁으로 많은 문화재가 파손되는 것을 보고 놀란 국제 사회는 1954년에 헤이그에서 협약을 맺으며 종교와 문화시설을 전쟁 중에도 지키자는 약속을 체결한다.

그러나 세계에서 전쟁을 가장 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참여하는 미국은 이 협약에 가입을 하지 않고 있다가 2009년에 가입했다. 코리아 문화재 유출이 10만 857개인데 日이 6만1000개다.日이 을사늑약까지 40년이니 그렇다고 하지만 코리아 전쟁 3년과 美 군청청 3년 만에 美國은  문화재 2만2700개를 유출했으니 그들에게 코리아는 축사에 불과한 것이었다.

美軍들을 통해서 국보인 고종의 옥새를 비롯 많은 문화재들이 약탈되어서 미국 경매시장에 나와서 팔렸다. 코리아 전쟁으로 불교 큰 사찰 백팔십여 개가 전소되었다.  미국! 이 부분에 대한 사과와 용서 배상이 있어야 한다.

<차일혁인가? 김종원인가? 답해야 한다>

전에 아산 경찰인재개발원에 강연을 갔을 때 차일혁 총경 동상을 보고 그에 대한 연구를 한 적이 있었다. 정말 코리아문화를 사랑한 자랑스런 경찰이다. 그는 전쟁 중 지리산 구례 화엄사 파괴를 명받았지만  거부하고 그가 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해 화엄사를 보존시켰다.

차일혁(1920년~1958년)은 김제출신이며 1938년 부터 1943년까지 팔로군과 함께 항일 유격활동을 했고 해방 후 경찰에 투신한다. 그는 가급적 귀순을 유도하여 많은 빨치산의 생명을 지켰다. 차일혁은  “이 싸움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벌어진 부질없는 동족상잔이었다고.”라고 전북일보에 기고했다.

<화엄사를 지켜라!>

1951년 5월, 전북에  8사단은 군경합동 회의에서 화엄사소각명령을 받는다. 회의 후 따로 모인 전투경찰대 지휘관들은 화엄사 소각 명령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이 명령은 녹음기에 빨치산들이 근거지가  될 만한 사찰을 소각하라는 것이다.

차일혁은  화엄사 대웅전 등의 문짝을 떼어내어 문짝만 소각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로써 화엄사는 전체 사찰이 소각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천은사, 쌍계사, 선운사 등 유명한 사찰 등 문화재들에 대한 폭격도 이런 식으로 대응했고  잇따른 명령 불이행으로 차일혁은 처분을 받았다.

1954년 충주경찰서 서장으로 발령을 받은 그는 충주직업소년학원을 설립하여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불우청소년들에게 학업기회를 제공했다.  지리산 빨치산 토벌시에 공산주의자들에게 온정적이라는 이유로 그는진해경찰서장으로 재직 시 좌익 혐의로 조사를 받았고 이후 좌천된 후, 1958년 금강의 곰나루에서 38세의 나이로 의문의 죽음으로 타계했다.

1958년 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으로부터 감사장을 수여받았고 1998년 화엄사는 화엄사 경내에 그를 기리는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그가 남긴 말이 깊이 남는다.>

“5천년 이어져온 우리 민족사라는 거시적인 안목에서 볼 때 지리산 빨치산과 토벌대의 대결은 극히 짤막한 순간에 불과한 것이다. 이 짧은 시간에 부상한 두개의 조국! 그 조국을 위해 이 땅에 뜨거운 피를 흘렸던 이 땅의 젊은이들!

그들에게 있어 조국은 둘인가? 하나인가? 시간이 흐르고 흐르면 빨치산을 토벌하던 토벌대, 토벌대에 희생된 빨치산도 같은 역사의 피해자라는 것이 밝혀지지 않을까? 새벽부터 들판에서 일하고 있는 농부들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가 무엇이고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과연  몇 사람이 이를 알겠는가? 지리산에서 사라진 수많은 군경과 빨치산에게 물어보라!

너희들은 왜 죽었느냐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혹은 공산주의를 위해서 죽었다고 자신있게 답할 자 몇이나 있겠는가?”

차일혁은 백선엽, 박정희 등 많은 경찰과 군 지휘관이 친일경찰이나 일본장교출신이었던 것과는 달리 독립군출신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 한인교사를 연행하는 일본인 형사를 폭행한 뒤 상해로 망명해 중앙군관학교에 들어갔다. 상해에서 의열단의 아나키스트그룹과 함께 일제요인 암살계획에 참여했고 해방 후 미군정이 일본 관리들을 중용한 것에 분노하여 권총을 구해 악명 높은 일경 등을 처단해 미군정청의 수배를 받았다고 한다.

<주류였으나 역적 김종원>

김종원(1922-1964)은 일본군에 자원입대해 남태평양에서 미군을 상대로 싸웠고 그 때 인육을 먹으며 버텼다고 자랑했다. 해방 후 국방경비대에 들어가 품행과 성적 불량으로 간신히 졸업했다.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김종원은 무리하게 진압작전을 펼쳐서 많은 부하들이 죽었다. 잃었다.  한국전쟁이 나자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영덕에서 수백 명을 학살했고, 마산과 부산형무소에 갇혀있던 정치범 3,500명을 학살한다.  대표적인 민간인학살인 거창학살 때도 부녀자들이 대부분인 500명의 피난민을 집단학살했다.

차일혁 총경은 권력에 밉보여 한직을 전전하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김종원은 이승만의 비호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거창학살에 생존자가 있어 이를 알리자, 국회에서 조사단을 파견했다. 그러자 그는 부하들을 빨치산으로 위장해 조사단을 기습했다.

외신의 대대적인 보도로 위장작전이 드러나 3년 징역형을 받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를 특별사면을 추진했고 육군참모총장이 반대하자 이승만은 “그는 이순신에 견줄만한 애국자”라고 말한다.  1956년 내무부 치안국장이 된다. 56년 장면 부통령후보가 저격당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배후가 바로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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